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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 계보

by 그인연 2025.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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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 태조 어진

 

조선 왕 계보 태조 이성계

 

1392년 7월 17일 이성계가 수창궁에서 즉위하면서 조선을 건국한다. 즉위 초에는 국호를 그대로 ‘고려’라 칭하고 의장과 법제도 모두 고려의 고사를 따를 것임을 선언했다. 그러나 차츰 새 왕조의 기틀이 잡히자 고려의 체제에서 벗어나려 했다

8월 20일 11살이 된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한다.

명나라에 대해 사대정책을 쓰면서, 명나라의 양해 아래 새 왕조의 국호를 ‘조선’으로 확정했다.

다음에는 새 수도의 건설이 필요했다. 우여곡절 끝에 왕사 무학의 의견에 따라 한양을 새 서울로 삼기로 결정했다. 1393년 9월에 착공해 1396년 9월까지 태묘·사직·궁전 등과 숙정문·흥인지문·숭례문·돈의문의 4대문, 광희문· 소덕문·창의문·홍화문의 4소문 등을 지어 왕성의 규모를 갖추었다.

1396년 8월 13일 신덕왕후 강씨가 병으로 사망한다. 이성계가 중 50여 명을 내전으로 불러 불공을 드리고 2급 이하 죄수를 사명하는 등 온갖 정성을 쏟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성계가 직접 묻을 자리를 찾아 안암동, 행주 등을 돌아다니다가 결국 취현방(정동 영국대사관 자리)으로 결정한다. 존호를 신덕왕후라 정했고 명복을 빌기 위해 능 옆에 흥천사를 크게 지어 자주 찾는다.

1398년 8월 이성계의 와병 중 이방원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으로 두 아들과 사위, 그리고 가장 총애하는 신하 정도전을 잃게 된다. 권력 앞에 인면수심으로 행동하는 자식들의 다툼에 인생무상을 느낀 이성계는 왕위를 방과(정종)에게 물려주고 상왕이 된다. 1400년 이방원이 왕에 오르자 정종은 상왕이 되고 이성계는 태상왕이 된다.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에 대한 태조의 증오심은 대단히 컸다. 태종이 즉위한 뒤 태조는 한때 서울을 떠나 소요산과 함주(지금의 함흥) 등지에 머물러 있기도 했다. 특히, 함주에 있을 때 태종이 문안사를 보내면, 그 때마다 그 차사를 죽여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여기에서 어디에 가서 소식이 없을 경우에 일컫는 ‘함흥차사’라는 말이 유래하였다. 하지만 태조는 태종이 보낸 무학의 간청으로 1402년(태종2) 12월 서울로 돌아왔다.

태조는 만년에 불도에 의탁했다. 덕안전을 새로 지어 정사로 삼고 염불삼매의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

1408년 5월 14일 창덕궁에서 이성계가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태종 이방원에서 이방원 역을 맡은 주상욱
태종 이방원에서 이방원 역을 맡은 주상욱

 

조선 3대 왕- 태종 이방원  

이방원(1367~1422)은 이성계의 다섯 번째 아들이다. 무장 가문이었던 이성계 가문의 유일한 문과 급제자로 어려서부터 부친의 희망이었다. 조선을 개국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으며 정도전을 죽이고 조선 3대 임금에 오른다.

1367년(공민왕 16년) 이성계와 신의왕후 한씨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난다. 점쟁이 문성윤이 한씨에게 막 태어난 방원의 사주가 매우 귀하다고 말해주었다. 훗날 그의 손에 죽는 남은은 어린 그를 보며 '이 사람은 하늘을 덮을 영기이다.'라며 찬탄했다고 한다.

1400년 11월 이방원이 조선 3대 임금에 즉위하니 바로 태종이다.

1402년 백성의 억울한 사정을 직접 풀어주기 위해 신문고를 설치하고 수도를 한양으로 다시 옮기는 등 국가 전반에 걸쳐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주자소를 세워 동활자를 제작했고, 호포를 폐지하고 저화를 발행했다.

왕권 안정을 위해 공신 이거이 부자와 이숙번을 유배 보낸다. 그리고 외척의 득세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처남들인 민무구, 민무질, 민무회, 민무휼 등을 사사시킨다. 또한 태종은 원경왕후 민씨를 교태전에서 사실상 유폐시켜 왕비와 외척이 어떠한 정치적 개입도 하지 못하게 하였다.

1414년에는 잔여 공신들도 부원군으로 봉해 정치 일선에서 은퇴시켜 말년에는 왕권을 견제할 만한 신권은 없었다. 이를 토대로 육조직계제를 단행하고 사전의 일부를 하삼도로 이급하였다.

1418년 2월 원경왕후에게서 얻은 넷째 아들 성녕대군을 그 누구보다 총애했으나 시름시름 앓다 사망한다.

1418년 6월 양녕대군 이제를 폐세자 시키고, 그의 장인 김한로도 유배 보낸다. 이후 3남 충녕대군 이도를 세자에 임명하고 2개월 뒤에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난다. 그러나 상왕이 된 후에도 수강궁에 머물며 4년간 줄곧 국정을 감독하였고, 병권과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1422년 5월 수강궁에서 사망한다.

 

 

 

 

조선 왕 영조 어진
조선 왕 영조 어진

 

조선 21대 왕 - 영조

조선 21대 왕 영조(1694~1776)는 52년 동안 왕위를 지켜 조선왕조 역대 임금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긴 왕이다. 숙종의 세 아들(경종, 연잉군, 연령군) 중 둘째이며 이름은 이금이다.

어머니는 숙빈 최씨이다. 비는 서종제의 딸 정성왕후이고, 계비는 김한구의 딸 정순왕후이다.

실록은 영조가 태어날 때부터 신체에 특이한 부분이 있다고 적고 있다.

왕께서는 특이한 자질이 있고 오른 팔에는 용이 서린 듯한 아홉 개의 무늬가 잇따라 이어져 있었다.

 

 

 

 

 

 

 

조선 26대 왕 -고종

 

조선 제26대 왕인 고종은 1863년부터 1907년까지 약 44년간 재위하며 조선 말기의 격동기를 이끈 마지막 실권 군주였다. 그는 철종의 뒤를 이어 불과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며, 흥선대원군의 아들로서 즉위 초기 10년간은 아버지가 섭정하며 실권을 장악했다.

1873년 명성황후 민씨 일족의 도움으로 친정을 시작한 고종은 흥선대원군을 물러나게 하고 본격적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했다. 1876년에는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을 개항시켰고, 근대화를 위한 여러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1895년 일본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당하는 을미사변이라는 큰 비극을 겪었고, 신변의 위협을 느낀 그는 1896년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1897년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자주독립국가임을 선포했다. 하지만 일제의 침략이 심화되면서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강제 퇴위당하고 아들 순종에게 양위해야 했다.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덕수궁에서 67세의 나이로 승하했으며, 그의 죽음에는 독살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조선 왕 계보도조선왕실 계보도
조선 왕 계보

 


조선왕조는 1392년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건국한 왕조로, 1910년까지 약 518년간 27명의 왕이 다스렸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아 성리학을 발전시켰으며, 세종대왕 시기에는 한글을 창제하고 과학기술과 문화가 크게 융성했다. 조선 중기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침을 겪으며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나, 이후 영조와 정조 시대에 문화적 중흥을 이루었다. 19세기 들어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으로 국가 기강이 무너졌고, 개항 이후 외세의 침략 속에서 근대화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 병합되면서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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